슬픔의 자리에서 길어 올리는 하늘의 소망과 위로. 본 목회 서신은 장례예배를 인도하는 동역자들을 위해 기독교적 슬픔의 본질, 성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깊이 있게 나눕니다. 말씀으로 상한 영혼을 위로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사역에 실제적인 도움을 드립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길어 올리는 소망: 장례예배를 위한 목회 서신
참고할 글
서론: 장례 설교, 가장 거룩한 위로의 사역
존경하는 동역자 목사님께,
우리가 감당하는 목회 사역 가운데 장례예배를 인도하는 것만큼 엄숙하고 거룩한 부르심은 없을 것입니다. 한 성도의 인생 여정이 마침표를 찍고, 남겨진 유족과 성도들이 슬픔과 상실감으로 신음하는 그 자리. 그곳은 단순한 추모의 공간을 넘어,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가장 절실한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장례 설교는 슬픔과 소망, 절망과 부활이 가장 첨예하게 교차하는 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지난 20년의 목회 여정 동안, 수많은 성도님들을 천국으로 환송하며 슬픔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때마다 부족한 종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어떻게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고, 흔들리는 영혼을 붙들어 주시는지 목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절감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설교 모음집이 아닙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말씀의 능력과 위로의 비밀을 사랑하는 동역자 목사님과 함께 나누기 위해 써 내려가는 저의 목회적 동반자로서의 서신입니다. 부디 이 글이 목사님의 장례 사역에 작은 보탬이 되어, 슬픔에 잠긴 모든 영혼에게 하늘의 참된 소망을 심어주는 귀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개별 설교 본문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의 위로가 세상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그 신학적 뼈대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례 설교는 감성적인 위로를 넘어, 반석과 같은 진리 위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1. 기독교적 슬픔의 본질: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아니하리라
효과적인 장례 설교는 유족의 슬픔을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물과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은 너무나도 실제적이어서, 그 슬픔을 외면한 채 천국 소망만을 기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친히 눈물을 흘리셨으며(요한복음 11:35),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인정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먼저 유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아픔을 말씀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독교적 위로의 독특성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슬픔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인 슬픔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다른 이유는, 이별이 영원하지 않다는 '부활의 소망'과, 성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잠자는 것'이라는 재회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우리의 슬픔은 절망의 표현이 아닌, 거룩한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눈물로 승화됩니다.
2. 성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장막을 벗고 본향으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며, 각각의 은유는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독특한 위로의 관점을 제공합니다. 목회자는 장례의 상황과 유족의 형편에 맞는 은유를 선택하여 말씀의 위로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 '잠자는 것' (Sleeping): 성경은 종종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이 은유는 죽음이 완전한 끝이나 소멸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을 전제하는 가장 부드럽고 소망적인 표현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고인이 고통 없이 평안한 안식에 들어갔음을 알려주어 유족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웁니다.
-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 (Taking down the tent): 고린도후서 5장은 우리의 육신을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장막 집'에 비유합니다. 장막은 언젠가 걷어야 하는 임시 거처입니다. 이 장막이 무너져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손으로 짓지 않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논리는,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더 좋고 영원한 본향으로 '이사'하는 과정임을 가르쳐줍니다.
-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 (Rest from labor):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오랜 투병 생활이나 고단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신 성도님의 장례에서 큰 위로를 줍니다. 이 땅의 모든 짐과 아픔, 눈물과 수고가 마침내 끝나고 완전한 평안과 안식에 들어갔음을 선포하며 유족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 '주와 함께 있는 것' (To be with the Lord):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담대히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도의 죽음의 본질이 사랑하는 주님과의 온전하고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줍니다. 이별의 슬픔을 넘어, 고인이 평생 사모하고 사랑하던 주님의 품에 온전히 안겼다는 사실은 남은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큰 위안과 평화를 줍니다.
3. 장례예배의 숨겨진 목적: 복음 전도의 기회
장례예배는 믿는 유족과 성도를 위로하는 일차적 목적을 넘어, 삶과 죽음의 실존적 문제 앞에 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교적 현장입니다. 평소 교회에 나오지 않던 가족, 친지, 지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인생의 유한함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선포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25)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유일하고도 명확한 대답이 됩니다. 따라서 장례 설교는 기독교인만 이해할 수 있는 전문 용어나 내부적 표현을 지양하고, 복음의 핵심(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부활, 영생)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고인의 삶을 통해 나타난 믿음의 증거를 나누는 것은, 복음이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임종 예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고 유족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좋은 기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권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결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말씀을 붙들며
우리의 유창한 말이나 잘 짜인 논리적인 설득이 상한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실 때, 비로소 상한 심령이 치유되고 깊은 절망이 흔들리지 않는 소망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선포하는 이 부활의 복음, 이 영생의 약속이 얼마나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영원한 진리인지를 담대하게 믿고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위로는 헛된 희망이 아니라, 빈 무덤으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이며,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슬픔의 자리를 지키시는 모든 동역자 목사님의 귀한 사역 위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고, 하늘의 평강과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채워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