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9장 9절-15절'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에스라 9장 9절-15절 설교: 압도적 은혜와 변명 없는 회개 (9-15절 주해와 적용)
1. 역사적 배경과 은혜의 역설: 노예 상태에서의 소생함
설교의 서론은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현실과 그 속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며 시작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비록 페르시아의 '종(노예)' 상태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헤세드)'을 베푸셨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어 '소생'하게 하셨고,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보호의 '울타리'를 주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든 은혜가 그들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토록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직후에 배신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 죄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합니다.
2. 죄의 본질: '거룩한 자손'의 혼합과 현대적 적용
본문에서 지적하는 죄는 단순한 국제결혼이 아니라, 우상숭배적 타협인 '가증한 일'입니다. '거룩한 자손'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성전 기물과 같은 '성물(聖物)'임을 나타내며, 이방과의 혼합은 곧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설교 적용점은 이를 인종적 문제가 아닌,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성공주의, 물질주의)과 타협하는 영적 혼합주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거룩한 자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세속화되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이방 통혼'임을 설교해야 합니다.
3. 은혜의 무게: 죄악보다 형벌을 경감하신 하나님
에스라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셨다"는 고백에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남은 자'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심판이 유예되고 경감된 결과입니다. 설교자는 은혜가 방종의 핑계가 될 수 없음을 강력히 선포해야 합니다. 오히려 은혜를 알고도 짓는 죄는 배신의 무게가 더해져 더욱 무겁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마지막 은혜인 '남은 자'마저 다시 범죄할 때, 더 이상 피할 곳 없는 완전한 진멸이 임할 수 있다는 거룩한 경고를 통해 회중의 각성을 촉구해야 합니다.
4. 진정한 회개: 변명 없는 '발가벗은 고백'과 공동체성
에스라의 회개에는 변명이나 상황 논리가 전혀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라며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엎드리는 '발가벗은 고백'을 드립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죄악"이라며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았습니다. 현대 교회는 죄를 환경 탓으로 돌리거나 개인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지도자가 먼저 공동체의 죄를 짊어지는 중보적 회개를 보여주어야 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변명 없이 죄를 직면하는 '거룩한 슬픔'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5. 기독론적 결론: 절망 끝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스라 9장은 "우리가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설 수 없나이다"라는 율법적 절망으로 끝납니다. 설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절망을 해결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기도를 드린 '저녁 제사' 시간은 영원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나(에스라의 결론),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음(복음의 결론)을 선포해야 합니다. 에스라의 눈물은 결국 우리를 온전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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