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다 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적인 소식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 깊은 곳이나 우리 공동체 안에 도저히 내 힘으로는 고칠 수 없을 것 같은, 곪아 터진 상처를 발견하고 막막해질 때가 있지요. 우리는 그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 바쁜 일상 속에 고통을 파묻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만약, 괜찮은 척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면 어떨까요? 진정한 치유를 위한 유일한 길이 우리가 잊어버렸던 처절한 '애통'의 회복에 있다면요? 오늘 우리는 약 2,700년 전,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만한 기이한 행동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한 예언자를 만나보려 합니다. 그의 이름은 미가입니다.
1. 하나님이 법정에 서실 때: 우리의 안전지대는 어디인가요?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실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레셋'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으로, 전쟁의 공포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앗수르 제국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던 때, 미가는 충격적인 환상을 봅니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성전에서 나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증인으로 세우고,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고발하는 검사로 법정에 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발을 디디시자 견고해 보이던 산들이 촛농처럼 허무하게 녹아내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재해가 아니라, 죄악 된 세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어 무너져 내리는 존재론적인 붕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의지했던 '높은 곳'들—돈, 명예, 성공이라는 견고한 성들이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2. 벌거벗은 선지자의 절규: 아프면 울어야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미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점잖게 설교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메시지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미가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처럼 컹컹거리고 타조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벌거벗은 몸은 장차 전쟁 포로가 되어 수치스럽게 끌려갈 백성들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적 행동이었습니다.
미가는 알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는 "고칠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내린 진단은 '죄'로 인한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은 죄를 짓고도 아파할 줄 모르고, 상처가 곪아 터져도 진통제만 찾으며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무감각함이 아닐까요? 미가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외칩니다. "죄가 보이면 아파해라! 상처가 깊으면 옷을 찢고 울어라!"
3. 지도에 새겨진 비극의 메시지: 당신의 '라기스'는 어디인가요?
미가는 자신의 고향 주변 쉐펠라 지역의 11개 성읍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 이름 속에 담긴 뜻을 비틀어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 이름에 운명이 담겨 있다는 히브리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곳은 '라기스'입니다. 성경은 라기스를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라기스는 유다의 강력한 군사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이집트에서 수입한 말과 병거를 비축하며 "군사력이 곧 안전"이라고 믿었던 불신앙의 진원지였습니다.
미가는 라기스(Lachish)에게 "준마(Rekesh)에 병거를 메우라"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힘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릴 것이기에, 도망갈 준비나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라기스'는 어디인가요? 하나님보다 더 은밀하게 의지하고 있는 통장 잔고인가요? 인맥인가요?
4.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 십자가로 향하는 애통
이야기가 너무 절망적인가요? 미가는 마지막으로 "독수리처럼 머리털을 밀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자녀를 잃은 어미의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애도의 의식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철저히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복음은 바로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썩은 부위를 아프게 도려내시는 이유는 그들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싸매시기 위해, 스스로 발가벗겨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상처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화려한 자존심의 머리털을 밀고,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려 우는 것입니다. 그 애통의 눈물 속에서, 진정한 회복의 싹이 트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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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라기스의 병거'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거룩한 슬픔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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